* 민주노총 조합원동지들께 드리는 글

사회연대노동포럼 공동대표 임성규(민주노총 전 위원장, 2009년)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009년의 민주노총'을 기억 속에서 굳이 꺼내고자 용쓰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비록 짧았던 1년간이지만 그 해 비대위위원장 · 위원장직을 수행했던 당사자로서 저는 결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매우 불미스러운 성폭력사건으로 민주노총이 발가벗겨지고 명예가 바닥까지 실추됐을 때 그 짐이 제 어깨에 떨어졌습니다.

1월 '용산 참사'에서 5월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 투쟁', '쌍용차 투쟁', 하반기 '노조법개악 저지투쟁'까지 한날한시도 긴장을 놓아보지 못했던 한 해였습니다. 무슨 무용담을 자랑코자 그 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연일 사건 사태가 터지는 와중에도 그 불미스런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의 선동도 한몫했지만.

그 때 저는 ‘사회연대전략’을 던졌습니다. 혹자는 '국면전환용'이라고 했고, 또 혹자는 저의 말꼬리를 잡아 비틀거나 자신들이 내용을 멋대로 만들어 그 사회연대의 진의를 비난하고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8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사회연대전략은 완성된 그림 없이 집도절도 없는 유령처럼 처량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부분 잊고 상처도 아물었는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2009년' 그 해에 정말 갈증이 나도록 절실했던 게 있었다면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어줄 진보정당이었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을 제법 가진 진보정당의 위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갈증은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불과 그 해 1년 전까지만 국회의원 10석을 가졌고 ‘다음총선’에서는 교섭단체를 구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민주노동당이 있었습니다. 그 민주노동당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분당했고, 그리하여 총선에서 두 개로 갈라진 진보정당들은 쓴맛을 봐야했습니다.

저는 위원장 임기 내내 공식 비공식 자리, 크고 작은 집회에서 듣는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민주노동당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고, 간담회 토론회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분열된 양당의 대표들과 따로따로 혹은 함께 뜻을 모으고 '통합에 이의 없음'을 수없이 확인했습니다. 집행책임자들의 모임에서는 너무 윽박지른다고 심한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저의 후임 위원장들도 숱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민주노총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민주노동당을 희망으로 바라봤던 시민들의 열망이기도 했으니까요.

다 지나간 일입니다. 이제껏 생존하고 있는 진보정당들 정말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분당 분열이 민주노조운동에,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아니 노동자 대중들에게, 나아가 수많은 시민들에게 결코 잘 한 일은 아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동지 여러분, 참으로 미안합니다.

저는 2017년 올해 예순 한 살의 나이와 부닥쳤습니다. 1980년 10월 1일자로 서울시 지하철운영사업소(서울지하철공사 이전) 역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2016년, 바로 작년 6월 30일자로 정년퇴직하기까지 35년여의 세월을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다섯 번의 체포·구금 및 수배·구속을 당했고 22년을 해고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다행히 지하철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이 저의 해고를 명예로운 훈장으로 여겨 잘 살펴준 덕에 거침없이 사업장 밖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의 해고와 세 번의 복직 끝에 정년퇴직이라는 마침표까지 찍게 해 준 것도 노동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정말 소중하며 어쩌면 최후의 보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동조합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노동자의 정당을 필요로 했고, 그 본격적인 시작이 바로 민주노동당이었습니다. 이제 그 민주노동당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조합원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민주노동당의 '태낭'이라 할 수 있는 1997년 '국민승리21'의 총무위원장이었고, 민주노동당 당원번호 33번이었으며, 대의원, 회계감사(2003년)였던 자로서,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과 본부장, 공공연맹의 사무처장과 위원장, 민주노총의 위원장까지 역임하는 동안 당 분열의 한쪽에 있기도 했었고, 분당을 막기 위해서 소수파로 전락하기도 했었으며 분당이후 통합을 위해 악악거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책임은 책임입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들 다수가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회에 결합하여 진보정당을 성장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섰으나 저는 다른 길을 걷게 됐습니다. 아마도 이번 대선기간 동안만일 겁니다만 그래도 죄송합니다.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데 진보정당들로부터 어떤 제안도 부름도 못 받을 정도로 제가 덕이 부족해서 더더욱 죄송합니다.

분열된 진보정당들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간절하고 절절하게 바랍니다. 송구스럽게도 저는 시간도 힘도 없지만 진보정당들의 통합 단결에 더 이상 진을 빼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그 일은 각 당 실세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시 힘차게 사회연대전략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나갈 것입니다.
저는 사회연대전략을 유령이 아닌 떳떳하고 알찬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가꿔나가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저 혼자의 능력이나 지식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다행히 함께할 동지들을 발견했고, 또 누구라도 같은 뜻을 가졌다면 울타리는커녕 대문도 달지 않은 광장에서 환영할 것입니다. 과거의 관계가 어떠했든, 요즘 유행하는 적폐청산의 대상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선에서는 선거 이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의제와 노동 의제가 당장 해결되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쪽을 지지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저는 선거기간 동안 희망을 가졌다가 그 직후부터 다시 절망적인 상황을 맛보아야 할 나이는 지난 것 같습니다. 크고 반듯한 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해봅니다.

2017년 4월 17일